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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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주기도문에서“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문장에서 일용할 양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루에 세 번씩 먹는 육신적인 음식, 아니면 정신적으로 먹는 지식, 또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말씀 등으로 생각하면서 주기도문을 해 왔다.
이에 대한 반박하는 차원의 글이 아님을 먼저 전제를 하고 글을 써 본다. 많은 분들이 문자적인 개념으로 젖어온 가운데 말씀을 임하다 보면 본래 갖고 있는 의미와 뜻을 올바르게 전달되지 못한 상태에서 접근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성경 속에 담겨 있는 본질과 뿌리를 찾는 것이 성경학의 근본적인 취지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 양식이 없다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정도가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삶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식사하셨는지 궁금한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진정 예수님께서 무슨 양식으로 살아가셨는지 성경 전반에 걸쳐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무슨 음식을 대접하고 싶을까? 하는 의구심 속에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는 장면은 그 어느 복음서에도 나타나지 않는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오래 전에 이 내용을 갖고 일산의 모 교회에서“예수님께 식사 대접해 보셨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4장 1~26절까지는 예수님과 사마리아와의 대화 내용이었고 27절부터는 제자들이 돌아와 여인과 대화를 이상히 여겼지만 질문하는 제자가 없었다. 그리고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식사를 하시라고 말씀을 드리는 순간이다.
32절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며 웅성거리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 먹는 양식에 대한 정의를 말씀하고 있다. 34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38절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무엇이 양식인지 발견해야 한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이며 전도 대상자들에게 단순히 말씀을 전하는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잡수시는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그렇다면 아직도 삼시 세끼를 구하거나 아니면 삶 속에 공급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예수님의 양식이 우리가 먹는 육신적인 음식이 아니라 생명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여 살려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구하는 양식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전도에 관련된 서적이나 세미나에서 이런 내용을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진정 나에게 보내주시는 사람들, 즉 전도대상자를 구하는 것이 나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양식인데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양식을 찾고 있는가? 그래서 요한복음 6장 27절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
그 다음 구절내용이 너무나 중요하다. 제자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기독교가 얼마나 복잡해졌는지 어렵게 믿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이 내용을 강의했는데 어렵다고 하거나 왜 일용할 양식을 그렇게 풀이를 하느냐? 등 힘들게 강의를 접하는 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을 들은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
구절 원문에는‘어렵도다’라는 표현보다는‘딱딱(단단) 하도다’로 되어 있다.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소화하기에 벅찬 음식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줘도 어렵다고 한다면 내 입에다 꼭꼭 씹어서 아주 소화하기 좋게 만들어 상대방 입에다 넣어 줘야 하는 상황이다. 언제 그렇게 해서 수많은 먹일 수 있겠는가?
물론 어린 심령, 즉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내용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영혼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그 중에 소화기능이 떨어진 심령들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도 생기는 소화 장애를 일으켜 일상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소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본인도 이런 말씀을 알기까지 몸부림친 것을 돌이켜 보면 얼마나 무식했는지 그리고 아둔하여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은 심령을 만날 때마다 과거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식은 육신적인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상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양식이요, 그런 대상자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 앞에 자기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이 진정한 섬김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교회나 목사님을 자랑하는 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것보다 더욱 영혼을 살려내는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각 사람들 속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깨닫게 해야 하며 그 분과 한 몸으로 이루어져 살아가도록 함께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의 진수다.
이것을 전할 수 있도록 내게 보내주신 영혼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바로“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 속에 주기도문을 올바르게 깨우치고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전도대상자를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는 이가 구할 것은 오직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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