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로등 / 최명진
나는 가로등
그러니까, 추억 없는 딴 동네의 아이
각자의 캄캄한 발밑
말주변에 골몰하는 수줍은 머저리
사랑을 억 만 번 긍정하는 비대한 눈꺼풀
발랄한 여름소녀를 기다리는 웃기셔 펭귄
나는 가로등
말하자면, 철침 위에 목만 얹은 무거운 얼굴
밑도 끝도 없이 달려드는 나방
젊음을 탕진한 피터 팬의 술친구
우리 집 담장 밑에서 밤새 울고 간 신데렐라의 계모
새벽에 남은 구두 한 짝
나는 뭐랄까,
어딘가 쓰다만 노트
낙서가 간직한 망상
망상을 망상하는 허상
허상 위에 매달려 우는 엉뚱한 매미
계절을 헛도는 이른 아침
어제를 밟고 간 자전거
나는 그러니까, 불 꺼진 가로등
아무도 없는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