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진(寫眞) - 기형도
어떤 강(江)물도 그의 성역(聖域)을 범람하지 못했으리라
한 세상(世上) 뜬구름만 잡으려 길을 떠난 아버지는
뜬구름으로 돌아와 사각(四角) 빤닥종이 위에 복고풍(復古風)으로 앉아
은화(銀貨) 같은 웃음만 철철 흘리고 계셨다
대리석(大理石)으로 기둥을 댄 그이 신전(神殿) 밑동에서
일찍이 사금파리 따위로 손가락을 베어내는
못생긴 재주만을 익힌 나의 남국(南國)의 방(房)에서
나는 출발(出發)했던 것일까 아버지의 성역(聖域)에선
날감자 냄새 유충(幼蟲)의 알같이 모여 있는 햇빛의 등속
평화(平和)란 그런 것이니라. 세상(世上)의 끝간데는 한가닥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밤이 들어 새앙쥐들이 물고
뜯는 더러운 달빛이나 풀벌레들의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어떤 강(江)물도 나의 성역(聖域)을 범람ㅎ지 못했던 까닭은
내가 때로는 혼탁한강(江)물로 먼저 흐르고 비가 되기 전에
먹구름 속으로 물총새처럼 파묻혔던 것을. 아들아, 세상(世上)은
살아볼 만한 것이냐 너의 파닥거리는 경험(經驗) 이전에
나는 이미 너의 중심(中心)을 잡는 조골(助骨)이 되어 있느니라
해바라기 커다란 청동(靑銅)잎새 지는 가을날 뜨락
오랜 시간(時間)의 질곡은 언제나 습한 순풍(順風)으로 후대(後代)의
피를 덥혀주고 우리가 사랑에 힘입고 무럭무럭 자라날 때
어떠한 평야를 살찌우지 못하랴 어느 광야를 잠재우지 못하랴
사랑이란 이름으로 평화(平和)란 이름으로 되살아 흘러내릴 강(江)물 속으로
아버지의 다리에 구겨진 칼날 같은 흔적조차 미더운 전설(傳說)임에랴.